우리는 왜 이렇게 많은 기억을 안고 살아갈까요. 지나간 일, 후회, 상처까지 쉽게 잊지 못한 채 오늘을 살아갑니다. 가끔은 아무 생각 없이 지금 이 순간만 느끼며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금붕인(金-人)’은 그런 마음에서 태어난 캐릭터입니다. 금붕어는 흔히 금방 잊는 존재로 알려져 있습니다. 방금 전의 일을 오래 붙잡지 않고, 눈앞의 움직임과 빛에 반응하며 살아갑니다. 저는 이 모습이 오히려 지금을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태도처럼 느껴졌습니다.
'금붕인'의 머리가 금붕어인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잊고 싶었던 기억, 내려놓고 싶은 감정들, 잠시라도 가볍게 숨 쉬고 싶은 마음을 상징합니다. 하지만 몸은 인간입니다. 여전히 일상을 살아가야 하고, 관계와 책임을 감당해야 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입니다. '금붕인'은 도망치고 싶은 마음과 살아가야 하는 현실이 동시에 존재하는 상태를 담고 있습니다.
'금붕인' 주변에 떠다니는 세포 모양들은 그런 마음속 감정들을 보여줍니다. 기쁨, 슬픔, 불안, 희망처럼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들이 작은 형태로 시각화되어 '금붕인'의 곁을 맴돕니다. 이 감정들은 사라지지 않고, 그렇다고 완전히 우리를 붙잡고 있지도 않은 채 함께 존재합니다.
'금붕인'이 전하고 싶은 이야기는 단순합니다. 아직 오지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하거나, 이미 지나간 일에 너무 오래 머무르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 지금 이 순간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습니다.
이 작품을 마주한 분들이 잠시라도 숨을 고르고, 현재에 머무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금붕인을 바라보며 마음속에 떠다니던 생각들이 조금은 가라앉기를, 그리고 지금 여기의 감각을 천천히 느껴보길 바랍니다.
우리의 삶은 어쩌면 작은 수조 안에 있는 것처럼 제한적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빛나는 순간들은 분명 존재합니다. 그 순간이 관객의 마음에 조용히 닿기를 바랍니다.
Human beings rarely live in the present. We carry unresolved memories from the past and anxieties about the future, often losing our ability to fully inhabit the moment. Goldfish-Man originates from this question: Why has it become so difficult to remain in the present?
A goldfish is commonly associated with short memory. Rather than seeing this as a deficiency, I interpret it as an alternative mode of existence. The goldfish does not dwell on the past or anticipate the future; it responds only to immediate sensations—light, movement, and rhythm. In a contemporary society overwhelmed by information and memory, this way of being feels paradoxically essential.
Goldfish-Man is a hybrid figure with the head of a goldfish and the body of a human. The goldfish head symbolizes the desire to let go—of memories, emotional burdens, and excessive self-reflection—while remaining attentive to the present moment. The human body represents responsibility, social identity, and the unavoidable weight of lived experience. This composite form embodies the tension between escapism and reality, forgetting and remembering, that defines modern human psychology.
The cell-like forms surrounding Goldfish-Man visualize emotional residues that cannot be easily erased. These shapes represent layered emotions such as anxiety, grief, hope, and quiet joy—feelings that persist even when we wish to release them. Floating around the figure, they express the coexistence of pain and healing, revealing the complexity of inner emotional landscapes.
Although the work begins with the fantasy of forgetting, its true focus lies in recovering a sense of presence. Goldfish-Man does not deny memory nor reject the future. Instead, it proposes a pause—a moment in which viewers can recognize their own emotional states and reconnect with the immediacy of now.
Through this figure, I invite the audience to reflect on how they inhabit time. Life may unfold within limited conditions, like a fish within a tank, but even within those constraints, moments of awareness and clarity continue to emerge. Goldfish-Man draws attention to those fleeting yet meaningful moments that quietly sustain us.
투명하지만 다정한 세계를 위한 행위들
작가 이승연은 사회적이거나 개인적 관계에서 벌어지는 물리적인 혹은 감정적 폭력과 상처의 순간과 감정에 주목하고 자기-치유의 과정을 찾아 간다. 팝아트 스타일 작가들이 현대 사회의 부조리와 아이러니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시그니처 캐릭터를 만드는 것처럼, 작가는 멍한 눈빛의 ‘금붕인’을 이라는 캐릭터를 만든다. 그렇게 금붕인들이 가득한 페인팅, 조각, 설치, 굿즈 등으로 ‘금붕인-유니버스’를 창조한다.
놀이 공원 마스코트 같은 3차원 인형탈이 아닌, 눈 맞춤이 불가능한 2차원 가면같은 금붕인의 얼굴 부분보다 더 눈에 띄는 건, 금붕인의 행동(제스처)와 공간이다. 미디어나 인터넷의 사건, 사고나 개인적 경험과 기억에서 가져온 동작들은 관계적 행위라기 보단, 폭력과 상처의 행동들이 나열되고 반복되면서 하나의 패턴처럼 보인다. 장소성의 맥락이 제거된 납작하고 진공같은 공간에 부유하듯 떠있거나, 시간성을 순간 캡쳐하듯 박제된 행동들이 반복적으로 채워지면서 폭력과 상처에 대한 감정과 인식의 거리감이 생긴다. 이런 순간, 우리는 ‘뭐 사는 게 다 그렇지’ 하는 방관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여지는 행동 너머를 탐색하는 행위자가 될 것인가.
폭력과 상처를 퍼포먼스 하는 금붕인 행동들이 가득했던 공간은 점차 내면의 세계를 구성하는 비인간 요소들이 함께 등장하기도 한다. 사실 ‘금붕인’ 캐릭터가 ‘우매한 인간의 모습을 대변한다’고 말하지만 여전히 인간적인, 인간중심적인 위치에서 사유한다면, 사물, 감정 등 비인간들이 채워지는 공간은 좀 더 상호-관계적인 사유에 대한 전환의 가능성을 의미한다. 마치 우리가 공간을 수학적인 3차원의 절대적 공간으로 인식하지만, 실제로 공간은 상대적이면서 관계적인 공간이듯이, 인간-관계에 집중된 폭력과 상처의 구조를 개인의 경험과 감정이나 현대사회 문제로 전형적으로 접근하기 보단, 다층적이고 관계적으로 들여다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크고 작은 사이즈나 재료들로 변주를 보이는 페인팅, 미니어처 조각, 공중에 매달린 모빌, 귀여운 굿즈들로 확장되는 ‘금붕인 유니버스’를 단순히 매체나 재료의 시도로 여기기엔 무리가 있다. 작가는 금붕어를 알레고리로 교훈적이고 전형적 우화로 관람객에게 설명하거나 ‘내가 경험해봤는데 말야’ 하며 인생을 가르치기보다, 인간과 사회의 부조리와 상실을 드러내는 개인적 치유와 관계적 공감의 자리를 넓혀가려는 사회적 행위들을 조금씩 조금씩 해 나아가는 것이다.
아주 사적이고 감정적인 개인의 경험과 기억의 기록에서 시작했을 ‘금붕인’ 작업이 관계적인 ‘금붕인 유니버스’까지 가능했던 이유는 결코 쉽지 않았을 과거 속 나와 나를 둘러싼 세계와 관계를 흘려보내지 않고 들여다보고 곱씹었던 마음일 것이다. 작가는 ‘금붕인 유니버스’를 만들어낸 짧지 않은 시간과 과정에서 그런 투명하지만 오롯한 마음으로 스스로와 타인에게 다정한 치유를 건넬 수 용기와 의지를 지키고 키워왔다. 그래서 꽃길만 가득하기 어려운 미술계에서 젊은 작가에게 귀한 자산이며 비빌 언덕이기에 그 다음 세계를 위한 과정을 기대하게 된다.
- 채은영(독립기획자)